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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 지금도 좌우파 차별이 있나?당싱있어서 정말 나는 행복합니다

작성자
한기주
작성일
2016.12.12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13
내용

항일 독립운동 지금도 좌우파 차별이 있나?
광복 70주년, 최현열씨 분신을 통해 나타난 역사 안에 감춰진 진실들
12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80대 노인이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광복 70주년 기념일이 다가오는데도 위안부 문제에 끄떡도 않는 일본에게 사과와 보상을 촉구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대협의 수요집회 현장에서다.
분신 당사자는 81세 최현열 씨, 최씨는 이곳에서 몸에 인화물질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이후 분신한 최씨는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팔다리 등에 3도 화상을 입고 위독한 상태다.

이날 분신한 최씨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39;의 회원으로 2주에 한 번 정도 수요집회에 참석해 왔는데,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는 일본에 항의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기 위해 몸에 불을 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분신한 최씨가 일제강점기 온몸으로 저항한 독립운동가 후손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사건은 지금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최씨의 부친은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 최병수씨(작고), 이분은 1932년 6월 조선 독립 쟁취를 목적으로 한 ‘영암 영보 농민 독립만세 시위 사건’에 참여해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 받은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런 기록이 있음에도 최병수님은 아직도 독립유공자 추서가 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선지 이날 최씨는 분신 현장의 가방에 남긴 유서에서 2남2녀 자녀들에게 “불타는 마음 불나비처럼 뛰어들어 대한민국 제단에 바치고 역사의 향기가 풍기는 나의 조국을 껴안고 후회없는 나의 길, 나라 살리는 길을 내 발로 걸어가기를 결심했으니 내 뜻을 깊이 이해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다오”라면서 “장부의 결심을 바꿀수는 없고 현명한 대한민국 국민은 너희들을 잘 지켜주리라 믿고 너희들 곁은 떠난다”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화상전문병원인 한림대 한강성심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최씨는 전신에 56% 정도 부위에 화상을 입고 전체의 40% 정도가 3도 화상으로 아직 의식불명 상태다.

한편 이 사건 후 전남대 학생독립운동연구소 김홍길 연구실장은 분신한 최현열씨 부친인 고 최병수 님에 관련된 내용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포스팅, 최씨와 그 가족의 항일사를 전했다.

이 글에서 김 실장은 일제 강점기 당시 항일독립운동의 방법으로 ‘공산주의’가 표방된 사건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는 이를 빌미로 거의 모든 항일독립운동을 ‘공산주의’로 몰려고 기도했었다고 썼다. 최현열씨의 부친인 최병수 씨 등의 항일활동도 이의 범주 들었기 때문에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이들의 항일운동이 차별적 대우를 받았다는 주장이다.

이에 김 실장이 쓴 글의 전문을 인용한다. 그런데 본글은 개인이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쓴 글이므로 문장이나 교열 등에 신경쓰지 않은 점이 명백하다. 본보는 최대한 그 글의 원문을 옮겨왔으나 원문의 맥락에 전혀 손실을 주지않도록 최소한의 교열을 거쳤다. 아주 단순하게, 호흡이 긴 문단은 잘라서 정리하는 등의 교열 정도다.

아래는 최소한의 교정과 교열을 거친 김 교수의 글 전문이다.

오후에 주일미대사관 앞에서 일어난 최현열 어르신의 분신사건에 깜짝 놀랬고, 제가 수년전부터 추적해왔던 영암 사회운동사건 관련자의 후손이라는 점에 크게 가슴이 아픕니다. 어르신의 쾌유를 빕니다. 무엇보다 안타깝습니다.

영암 영보정 사건을 계기로 발생한 영암지역 사회운동가협의회 사건은 1930년대 전남지역에서 전개된 대표적인 항일농민운동입니다.

이 사건은 광주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전남 영암 일대의 20대 초중반 청년들이 다수 참여한 사건이며,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전시 체제로 들어가는 상황에서 조선에서의 농민, 노동자들의 항일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대규모 탄압을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최현열의 부친이 되는 최병수(崔秉壽, 1906년생)는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사람으로 소작쟁의 운동을 위한 소작인 청년회를 결성해 활동했는데, 당시 시대적 흐름에 따라 항일에 맞서는 공산주의를 표방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로는 최병수씨 외에도 최판옥, 김판권, 유용희(유혁), 곽명수, 최규창, 김석준, 박찬걸, 최규관, 한상엄, 김용운, 최석호, 최동림, 최동환, 문사훈, 박수봉, 신용주, 신용점, 하헌정, 하헌훈, 박유성 등입니다. 즉 이분들 총 100여명이 체포되었다가 그 중 72명이 재판을 받게 됩니다. 특히 이 운동으로 인해 영암출신의 대표적인 사회운동가인 유혁(유용희), 최규창(崔圭昌)(성진회, 광주학생운동), 김판권(일본공산당), 최상호(광주학생운동참여) 등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항일의 수단이자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선호했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단 하나 ‘사회주의’를 표방했다는 이유로 이들의 항일운동이 차별적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최현열 어르신의 부친이 되는 최병수님은 실제 1933년 1월 말에 체포된 후(형사사건부의 근거에 따른 추정), 미결 상태로 약 4개월 또는 6개월 이상 수감되었다가. 1933년 6월 광주지방검사국 목포지청에서 예심종결을 받아 재판에 회부된 것으로 기록이 나옵니다.

이후 1심법원인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1933년 9월 29일에 징역 1년을 받았는데 미결구류 240일(8개월)을 포함했습니다.

그 후의 기록은 그분이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항소되면서 1934년 3월 7일 대구복심법원(복심법원은 현재의 고등법원을 말함)에서 김판권을 포함해 총 34명이 재판을 받았던 것으로 나옵니다. 이때 최병수는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았으나 재판 후에도 석방되지 않고, 계속 수형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즉 1934년 9월 7일(수형인명부기록)까지도 수감된 사실이 확인된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병수님은 실제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투옥된 기간만 합쳐도 최소한 1년 9개월이 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외 형사사건부 두 번째 자료에 따르면 최병수님의 형량은 징역 2년 6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검토는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 마땅하지만. 최소한 이 사건과 관련하여 1933년 1월 말부터 1934년 9월까지 혹은 그 이상 수감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1934년 사건이 종결되고 난 후에 다시 어떤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다른 조직운동과 결부되면서 형기가 늘어나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많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일제는 걸핏하면 공산주의 사건을 때로는 조작하고, 사상운동 사건으로 몰아가서, 탄압을 했는데, 1933년 무렵에는 일본공산당 지도자들을 일부 회유하여 천황의 충성스런 신민으로 회유하는 한편, 저항하는 반제세력과, 항일세력을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즉 작은 시국사건을 크게 확대시키면서, 종종 사상범을 거칠게 다루고, 그 가족을 괴롭히며, 미결상태로 1년 이상을 수감하는 만행을 자행하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일제 강점기 하 사회주의 성향의 이념을 통해 독립의 방편을 찾으려던 분들을 터무니없는 색깔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정말 잘못입니다. & #39;분단 이후 반공이 통치의 수단일 때의 잣대로& #39; 들이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최병수 님이 해방 후 영암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더 확인이 안 됩니다.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가 해방직후 건준에서 활동했던 영암출신 인물로는 이창희, 문학연, 조극환, 최상호, 최규문, 조사원, 김필제, 최규동, 유근욱 등이 있는데, 최병수 님의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민위원회에도 마찬가지구요.

그렇다면 현재까지 파악된 내용으로 보면 최병수 님의 해방 후 행적은 ‘공산주의’와는 거리를 둔 것으로 추측됩니다. 따라서 최병수 님이 국가보훈 대상자로 지정되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데, 대체 정부는 어떤 이유를 대고 있는 걸까요?

단체 명이 영암사회주의자협의회라서 그런 걸까요? 그거 일제 당국이 편의적으로 지은 단체명이 아닌가요? 코민테른의 해체 후 재건 공산당이나 경성콤 등의 흐름은 있었지만, 지역차원의 공산당이 대규모로 결성된 것은 아닙니다.

친일파는 종종 교묘하게 역사를 변조하여 당당하게 독립운동가나 건국의 주역으로 변신하고, 진짜로 독립운동을 한 많은 분들이 아직도 역사의 응달에 있습니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최현열 어르신의 오랜 응어리진 한(恨)도 풀리고, 명예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독립운동은 원래 인정을 받는 게 아니라 베푸는 것이라 늘 외로움(獨) 위에서 자립(立)하는 길이었는지, 늘 이들이 걸었던 고난의 길을 가끔 생각하다 보면, 종종 눈물이 많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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